지정번호 : 국보 제11호(1962. 12. 20 지정)
현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규모 : 높이 6층 14.24m, 폭 11.5m의 정방형
특징 : 목탑을 충실히 모방한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양식
유래 :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연기설화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獅子寺)에 불공드리러 가는길에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청하여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루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미륵사지 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현존하고 있는 국내 최고 최대이며, 석조건축술 역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석탑의 시원이다. 그 이유는 석조물이지만 보는 순간 그 양식이 목탑과 비슷함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탑은 이전에 성행되었던 목조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대신 석재로 바꾸어서 충실하게 구현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층수는 6층으로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1915년)에 이루어진 붕괴방지 보수공사로 서남쪽이 시멘트로 메꾸어져 있어서 보기가 흉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이 탑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임시방편적인 보수 공사 덕분이다.

탑의 층수에 대하여 7층과 9층 설로 논란이 있었지만 80년대에 발견된 노반석의 크기와 남아 있는 탑신의 비례관계등 조사한 결과 9층탑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3칸, 측면3칸의 정방형으로 축조 되어 있는데 중앙의 1칸에는 탑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가 있으며 그 내부의 교차되는 중심에 한 변이 145㎝ 방형의 초반석이 놓여 있다. 초반석 중앙에는 사방99㎝인 심주석이 서있다. 이것이 곧 찰주 인데 이러한 석주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과 같은 형식이며 그 포개진 면의 정교함은 고도로 발달된 석조기술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초층에는 배흘림 형식을 갖춘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과 창방을 가설하였으며 이 돌들을 통하여 기둥으로 탑 상부의 수직 하중을 전달하게 되어 있다. 그 위에는 목조건물에서 공포에 해당하는 3단의 옥개받침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목조건물의 가구 수법을 본받고 있다.

모든 옥개석 추녀의 귀 부분에는 풍탁을 달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옥개석은 얇고 넓지만 탑신에 비하면 좁게 보이며 네 귀퉁이의 전각에 이르러 약간 반전 되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초층 보다는 훨씬 얕아졌으나 각 층 높이의 차이는 심하지 않으며 평방이나 창방 형태가 보이지 않고 있다.

3층과 4층의 결구는 탑신 받침이 2단을 놓고 있다. 탑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탑신과 층고가 비례적으로 작아지고 있기 때문에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탑을 바라볼 때 탑의 상층부를 더욱 작아 보이게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것을 교정하여 앙시미를 살리기 위해 아래에서는 노출되지 않는 탑신 받침석을 4층부터 2단으로 높혔다. 그리고 5층이상의 층급받침은 3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고 있다.

이 석탑에서 이용한 안쏠림 기법과 귀솟음 기법은 현존 목조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석탑의 경우 발견된 예가 없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에 관하여는 석탑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양식과 수법 그리고 삼국유사의 권2 '무왕조'의 내용등을 종합 고찰해 볼 때 백제 말기인 무왕대(600∼64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