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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 검문소 사거리에서 시내로 가는 720번 지방도로를 따라 2.1㎞ 가다보면 길 오른쪽으로 쌍릉 표지판과 함께 능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0.8㎞ 더 들어가면 쌍릉의 하나인 대왕묘가 나오고 묘 뒤로 돌아 왼쪽 소나무 숲길을 따라 150m 쯤 가면 소왕묘가 나온다. 2기의 봉분(封墳)이 남북으로 약 150m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쌍릉(雙陵)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중 크고 북쪽에 있는 능을 말통대왕릉 또는 대왕묘(大王墓)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규모가 작간 작은 능은 소왕묘(小王墓)로 알려지고 있다.
이 쌍릉은 부여 능산리(陵山里)의 백제왕릉(百濟王陵)과 동일한 석실분(石室墳)으로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에는 청주한씨(淸州韓氏)종중에서 고조선(古朝鮮) 준왕(準王)의 남천설(南遷說)과 결부하여 시조(始祖)의 묘로 받들고 석물을 갖추고 매년 시제를 지내고 있다.
신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익산군 고적 쌍능조(雙陵條)를 보면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보 되는 곳에 있는데,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능이라 하였다. 그런데 속칭 말통대왕(末通大王) 능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것이라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능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6년 3월 왜구의 노략질로 여러번 도굴된 바 있으며, 일본인이었던 세기노씨(關野氏)가 대정육년(大正六年)인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대왕묘는 지름이 30m, 높이 5m 정도, 소왕묘는 지름24m, 높이 3.5m 정도의 원형분으로 백제 말기의 부여 능산리 5호분의 수법과 같고 원형 봉토의 주위에 괴석(塊石)을 두른 석렬의 흔적이 있으며, 전형적인 백제고분양식(百濟古墳樣式)인 횡혈식 석실분으로 축조되었고 조성시기가 7세기 전반으로 밝혀졌다. 석곽(石槨)은 화강석으로 된 대판석(大板石)으로 짰으며 현실(玄室) 앞에는 단면 사각형의 연도가 있고 장방형의 큰 판석으로 현실 입구를 막았다.
현실은 단면 6각형의 간단한 말각천정식(抹角天井式)을 갖는 평면 장방형의 석실로서 석실 중앙에 화강석으로 만든 관대(棺臺)가 있고 그 위에 윗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으며 둥근 뚜겅을 덮은 목판을 올려놓아 백제말기의 왕능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대왕묘에서 부패된 목관과 토기완(土器碗) 1점이 수습되었다. 목관에 사용되었던 옥정(玉釘)도 10여개가 출토되었다. 소왕묘는 대왕묘와 동일한 형식으로 도굴 당하여 부장품(副葬品)은 전혀 발견치 못하였다. 나무널(木棺)은 복원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