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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金馬) 소재지에서 전주(왕궁리 오층석탑)쪽으로 약 1㎞ 쯤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들판에 금마를 남류(南流)하는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떨어져 마주보며 2구(驅)의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다. 이를 속칭 인석(人石)이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길에 자갈을 깔아 사람들이 자유로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고, 옥룡천에는 다리를 가설하여 양쪽을 넘나들며 2구의 석상을 두루 살필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그리고 석불입상 주위는 석축을 쌓아 정비를 잘 해 놓았다.
이 2구의 석불입상은 하나의 사다리꼴의 석주(石柱)에 불두(佛頭)로부터 석좌(石座)까지를 조각하였다. 높이가 4.27m나 되고 머리 위에는 네모꼴의 몸통보다 넓은 관(冠)을 얹었으며, 얼굴은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옅은 웃음기를 담은 가느다란 입등이 간략하게 표현된 모습은 매우 소박하면서도 친근하여 오히려 장승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사계절 변해가는 주변 들판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어울리는 지킴이처럼 소박해서 믿음직하다. 목은 한줄로 처리되었고 양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옷으로 가리워졌고, 석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내었고 발등은 간략하게 처리되었고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되었다. 머리에 얹힌 관만 별석(別石)으로 만들고 몸통은 한 돌로 만든 이 똑같은 2구의 석불입상(石佛立像)은 멀리서 바라보면 불상(佛像)이라기보다는 늙은 도사(道士)가 마치 금마읍의 동구에서 금마를 수호하는 수호신과 같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흔히 인석(人石)이라 호칭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근에 위치한 입석리(立石里), 구기리 등에서 구전(口傳)되어 오는 촌로(村老)들의 구술(口述)에 의하면 벅수라고 부르기도 하며 장성 또는 장승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이 2구의 입상 중 동편의 입상은 남자상(男子像)이고 서편의 입상은 여자상(女子像)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石佛立像)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조선 철종 9년(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黃鍾奭)이 다시 세우고 군남석불중건기(郡南石佛重建記)의 비문을 남겼다. 일명 쌍석불중건비(雙石佛重建碑)라고도 불리우는 비석의 비신(碑身)은 대리석(大理石)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가 158㎝, 폭이 66㎝, 두께가 16㎝로 형태는 호패형(戶牌形)이고, 화강암으로 된 방형대석(方形臺石) 위에 세웠다. 비의 글은 하완군민(下浣郡民) 소휘건(蘇輝健)이 기(記)하였다. 이 비문에서 이 석상을 불상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석불중건기에는 항간의 이에 대한 전설을 몇가지 수록하여 놓았다. 즉 금마는 익산 구읍(舊邑)의 자리인데 동·서·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마을의 기가 허하게 생겼기에 기가 누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또한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부로서 인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기에 금마산을 혹자는 마이산(馬耳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석상은 남녀 석상으로서 이들이 서있는 사이로 옥룡천이 흐르기 때문에 이들은 평상시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子正)에야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그 때야 두 인석은 서로 건너와서 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가 선다고 한다.
이 석불입상은 풍수설(風水說)에 얽힌 설화만 간직한 채 아무 유적이 없는 들판에 쓸쓸히 서 있는데 아마도 이는 불상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입석의 수호신적(守護神的)인 입장에서 동리를 수호하는 신상(神像)으로 세워진 것이라 보여진다.
이와 유사한 석상의 예는 충남 예산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 덕산에서 삽교읍으로 들어서자면 오른쪽으로 있는 수암산 자락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석조보살입상이 그것이다. 산 중턱에 세워진 이 석상은 전체적으로 굴곡이 없는 원통형으로서 머리 위에 관을 쓰고 있다.